'고졸학력' 커밍아웃한 만화가 이현세씨
'고졸학력' 커밍아웃한 만화가 이현세씨
'고졸학력' 커밍아웃한 만화가 이현세씨
 

“대학서 문학 공부해 스토리 탄탄하다 그럴 땐 그렇게 찔릴 수 없어” “거짓말은 저절로 굴러가지만, 말한 사람은 절대 못잊어 나를 구속하는‘까치 오혜성’ 사랑스럽고도 미운 존재”
“마누라는 허허 웃고 마는데, 애들하고는 좀 심각했다. 직장 다니는 큰딸이 ‘내일부터 어떻게 출근하냐’고 하더라. ‘나도 아버지한테 속았다’고 말하라고 했다. 속은 건 죄가 아니니까. 그러나 이거 하나만은 알아달라고 했다. 아버지 스스로도 그걸 고백하는 게 쉬운 일은 아니었다고.”

최근 출간한 만화책 ‘버디 3편’의 서문에서 “서라벌예대 중퇴라고 말한 게 거짓이었다. 사실은 고졸이었다”고 밝힌 이현세(李賢世)씨는 요즘 좀 당황스럽다. “만화책 서문에 쓰면, (만화 독자 수가 적으니까) 한 달쯤 흐르면서 조금씩 알려지겠거니 했는데, 문제가 커져 난감하다” 했다. 말은 그런데, 정말 당혹스러운 건지, 마음의 짐을 털어 가벼워진 건지, 얼굴 표정에선 그의 난감함을 읽을 수가 없었다. 우리 시대 최고 스타 만화가와의 인터뷰가 ‘학력 고백’에 관한 얘기로부터 시작된 것은, 스타 큐레이터였지만 가짜 박사로 알려진 신정아씨 사건의 파문이 큰 탓이다.

―서문을 언제 썼나? 고백 결심이 신정아씨 사건 하고 관련이 있나?

“이번 책 소주제가 ‘핸디캡’이다. 내 것도 이번에 털고 싶었다. 보름도 전에 책 서문을 써 넘기고 한 5, 6일 지났는데 신문에 그 얘기가 나오더라. 조용히 넘어가기 어렵겠단 생각이 들었다. 그렇다고 출판사에다 ‘서문 빼라’고 하기도 민망하고….”

―거짓을 말한 것이 가장 곤혹스러울 때는 어떤 때였나?

“젊어서부터 주위에 서라벌예대 나온 예술가들이 많았지만, 그들이 나에게 ‘정말 나왔느냐’고 물어본 적은 없다. 거짓이란 게 한 번 말하고 나면 그냥 저절로 굴러가게 돼 있다. 그런데 만화 히트하고 강의를 가면 ‘경주고 졸업, 서라벌예대 중퇴’, 어디서는 ‘서라벌 예대 수료’ 이렇게 소개되는데, 그땐 부끄럽고, 자존심도 있고 해서 밝힐 수가 없더라. 문제는 자기는 자기 거짓말을 한 순간도 잊지 못한다는 거다.”

―‘고졸’ 대신 ‘대학 중퇴’라고 해서 덕을 본 게 있었나.

“독자는 아니지만, 만화평론가, 기자들 평가에서는 좀 받았을 수도 있겠다. ‘대학에서 문학을 공부해서 스토리가 탄탄하다’ 이런 말 나오면 그렇게 찔릴 수가 없더라.”

―이 바보들, 하는 마음이었겠다.

“아니 그것보다는 아, 털고 가야 하는데 하는 마음이 들었다. 계속 끌고 가는 게 화가 나더라. 웃긴 건, 주변의 그런 평가 때문에 ‘작가의 말’을 쓸 때도 그렇게 신경이 쓰일 수 없더라는 거다.”


―우리는 모두 작심이든 아니든, 크고 작은 거짓말을 하고 살지만, 거짓말쟁이를 보면 분노한다. 그 심리는 무엇인가?

“거짓말쟁이를 보면 자기 모습을 보는 것 같고, 그래서 패주고 싶은 거 아닌가.”

―새로 나온 만화 얘기를 하자. ‘버디’는 LPGA에 나선 두 여성골퍼의 스토리다. 왜 골프인가.

“인생의 핸디캡은 누가 어떻게 해줄 수 있는 문제가 아닌데, 당구와 골프는 핸디캡을 인정해 주는 게임이다. 한번 시작하면 중단할 수 없고, 자만하면 대가가 따르지만 그렇다고 포기할 필요도 없다. 때론 운도 따라주니까. 게다가 양심도 많이 테스트하고. 이런 게 재미 있다. 요즘엔 일, 술, 골프만 한다.”

―‘공포의 외인구단’ ‘지옥의 링’ 등으로 80년대를 휩쓸었지만, 1998년 ‘천국의 신화’가 음란물 소송(2003년 대법원에서 무죄판결을 받았다)에 휘말린 이후 활동도, 히트작도 뜸하다.

“독자들은 변덕이 심한데 그게 바로 정직하다는 거다. 많은 독자들이 ‘이현세 돈 벌더니 변했다’, ‘힘이 떨어졌다’고 한다. 하긴 변했지. 예전엔 비 오면 연탄 꺼질까봐 걱정이었는데, 요즘엔 비 오면 감상에 먼저 빠지니까. 나는 논리보다는 ‘직관’으로 만화를 그리는데, 사람이 변하니 그림도 변하지. 예전엔 활활 타오르는 장작이었다면, 지금은 실험실의 알코올 램프 정도? 한 창작자의 예술적 성취를 주관적, 객관적으로 판단해봤을 때, 나는 예술적으로는 실패한 것 같다. 나 같은 선배들이 미국의 프랭크 밀러처럼 만화의 예술성을 획득하지 못한 게 우리나라 만화의 후퇴를 가져온 것 같은 자책감이 들기도 한다.”

―그럼 최고의 성공을 가져다 준 ‘공포의 외인구단’의 주인공 ‘까치, 오혜성’은 당신에게 어떤 존재인가?

“사랑도 하고, 미워도 하지. 사람들이 ‘까치가 안 나오면 이현세 만화 아니다’라고 하니, 이젠 내가 걔한테 붙들린 거다. 사실 내 만화를 영화나 드라마로 만들어서 크게 성공한 게 없다. 강한 만화 캐릭터가 실사로 만들어지면, 그저 딱딱하게만 표현되니까. 만화의 상업화를 주창했지만 결국 내 캐릭터는 가장 비상업적인 캐릭터가 됐다.”

인터뷰 중 ‘실패’란 표현을 여러 차례 쓴 그는 지금 자신의 상황을 “장승 밑에 앉아 쉬며 걸어온 길을 되돌아보고 있는 중”이라고 했다. 그러면서도 그는 스스로 ‘기획상품’이라 칭한 골프만화 시리즈 ‘버디’, 학습만화 ‘만화 한국사 바로 보기’ 시리즈, 마트에서 파는 단행본 기획물 ‘캐릭터만화 시리즈’를 작업 중이며, 한국만화가협회장직도 수행 중이다. “공사(公私)를 구분 못해 누가 부탁하면 거절 못하는 성격 때문”이다. “손학규 후보 지지명단에 들어있던데 이러다 정치하는 거 아닌가” 물었다. 그의 답은 이렇다. “거짓말 하나 한 걸로 이렇게 오래 빌빌댔는데, 아침 저녁 거짓말을 어떻게 하나. 연말 회장직이 끝나면 다시 작가로 살고 싶다.”

 
◆이현세 씨는
“이 사람아. 어떠노?” “괜찮습니다” 22일 이현세(53)씨는 작은아버지로 알고 있던 생부의 기일을 맞아 경기도 청평 동생 집으로 가서 어머니를 뵀다. 아들의 고백 사건을 접한 어머니는 그간 전화도 없었고, 이렇게 한마디하고 지나갔다.

“글쎄 연애하는 기분처럼 지낸다고 할까요. 그냥 피식 웃고, 눈빛으로 그냥 많은 얘길 합니다.”

모자 사이가 ‘연애하는 사이’처럼 된 데는 이유가 있다. 이현세의 가족사는 우리 근현대사의 비극적 축약본이다. 할아버지는 독립운동하다 만주에서 총살됐다고 얘기를 들었다. 할아버지의 둘째 아들은 6.25 때 인민군장교가 됐고, 큰아들은 헌병대에 끌려가 사망했다. 셋째 아들의 장남이었던 이현세씨는 남편 잃은 큰 어머니 댁의 대를 잇기 위해 양자로 갔다. 생부가 살아 계실 땐 그저 ‘작은아버지’인 줄로만 알다가, 스무 살 무렵 사실을 알았다. 키워준 어머니는 98년 떼강도를 만나 세상을 떠났고, 그 후 비로소 ‘어머니’를 “어머니”라 부르게 됐다.

“만화가가 된 건 운명”이라고 그는 말한다. 한 달간 술 마시고 방황하다가, (큰)어머니가 자신의 고민의 이유를 알게 되자 만화 창작실로 들어갔다. “그때는 만화 그리는 게 죄였던 시대라 그냥 그리로 숨어버렸다.” 적색과 청색이 섞여 있으면 구분을 못하는 색약이라 미술대학에 가지 못했고, 연좌제에 걸려 공무원도 될 수 없었다.

‘공포의 외인구단’ ‘지옥의 링’ 등 대표작의 주인공 까치, 오혜성은 철저한 아웃사이더다. 가진 것도, 배운 것도, 도와주는 사람도 없이 세상과 홀로 맞선다. 철저히 ‘배경 없는’ 주인공의 모습은 어쩌면, ‘배경 복잡한’ 작가의 모습인지도 모른다.